신(神)나는 하나님 나라, 신(神)나는 협동조합

기고, 한재경 / 하늘뜻교회목사
바야흐로 승자독식의 시대다. 주주 이익 극대화를 숭배하는 자본주의 기업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대형교회도 우리 시대의 승자다. ‘이웃과 더불어’. 이토록 아름다운 말이 그 실체를 잃어버린 세월이 얼마인가? 한 명의 천재가 거액의 연봉을 독식하고, 한 두 개의 대형교회가 지역사회를 독식해 버린 이민사회의 종교현상을 한탄하지만, 나는 이 상황을 수용하거나 받아들 수 없다. 승자독식의 패자로 한탄만하고 있을 수 없다. 크리스천으로서 성서 어디에서도 승자독식이 옳다는 구절을 찾을 수 없고, 이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형상에 다름아니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누가4:6).” ‘모든 것을 주겠단다. 승자독식의 유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난 2년에 걸쳐 실험한 ‘신나는 공동구매협동조합’은 거대하게는 승자독식에 대한 거부이고, 작게는 우리의 소비행위에 의미와 가치,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에 부합하는 열매를 얻고자 함이었다. 시작은, 일등만 우러러보고 일등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악마적 판세, 그 중심원의 가장 바깥쪽에서 촉발되었다. 심각하진 않지만 약간의 정신적 장애를 가진 이웃이 목사인 네게 기도를 요청하였다. 직업을 갖고 돈 벌게 해 달라는 기도제목이었다. 그분 앞에서 약속했으나,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똑똑하고 약삭빠르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 승자독식의 시대에 잘 부합하는 사람만을 고용하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협동조합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몇몇 지인들과 함께 6개월에 걸친 공부를 하면서 토론하고 고민했으나, 협동조합을 우리의 현실에 맞게 만들어내는 일은 너무 좁고 난감했다. 우리의 생각과 뇌구조는 이미 이 시대에 적합하게 세팅되어 있어서, 도무지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 공동 방과후 학교, 협동 이사짐 센타 등등 여러가지 고민을 했으나, 우리가 처한 현실과 맞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전라남도 완도의 교회에서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과 연결되었다.
아이디어는 일사천리로 현실화 되어서,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신(神)나는 소비행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우선은 판매하는 완도 어부가 신나고 행복해 했다. 자신들의 자식과 같은 해산물을 소중하고 귀하게 먹으며 감사해하는 소비자의 마음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지속적인 보탬이 되었다. 어디 어부뿐이랴. 구매하는 소비자, 우리들도 행복했다. 왜냐면 해산물이 신선할 뿐 아니라, 가격 또한 시중보다 10% 이상 저렴했다. 공동 구매의 힘이다. 두번 모두 11월에 구매했는데, 이 때 햇김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모든 김은 생산된지 20일도 되지 않는 햇김이었다. 완도산 말린 홍새우 또한 그 깊은 국물맛과 고소함에 충분히 만족했다. 구매자의 만족은 물량의 증가로 증명되었다. 첫해보다 두번째 해의 물량이 두배로 늘어난 것이다. 지역도 뉴욕, 뉴저지에서 버지니아, 텍사스, 커네티컷, 로드 아일랜드로 확대되었다. 물론 지역교회의 참여가 큰 힘이 되었다.
행복하고 신나는 그룹은 더 있다. 단 하루였지만, 드디어 장애가 있는 이웃에게 일자리가 창출된 것이다. 저는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제일 행복했다. 해산물이 도착하고 주문받은 품목별로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한가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고용한 이웃이 한글을 읽지 못했다. 대안은 금새 나왔다. 교회 공동체 자원봉자들이 1차로 분류작업을 마무리하고, 고용된 이웃은 2차로 확인해주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숫자만 확인하면 되었기 때문에 한글을 읽지 못하는 상황이 극복되었다.
그렇게 행복한 ‘노동’이 이뤄졌다. 신나는 일은 더 일어났다. 이익의 극대화가 아니라, 합리적인 이문이 남았고, 이 돈은 선교비로 전액지출되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에게 귀하게 사용되었으리라 믿는다. 추가로 이민사회 지역 공동체를 위해 1년에 1번만 공동구매를 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소비행위를 생각해 본다. 대부분 돈을 벌거나 쓰는 행위는 내 자신, 좀 더 넓게 잡아야 가족에 한정된다. 지극히 이기적인 소비행위이다. 내 소비나 노동이 우리 자신을 넘어서서 이웃으로 확대되는 경우는 흔치않다. 교회에 헌금하는 행위가 그나마 여기에 속하는데, 이 또한 제대로 어려운 이웃 속에 숨어계신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는지 의심이 간다. 교인이 좀 많아진다 싶으면, 예외없이 건물구입으로 나아가니 무슨 법칙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다시 성서, 얼마나 신났을까? 자신의 점심 도시락을 기꺼이 헌납한 아이(요6:9)뿐만 아니라, 얻어 먹은 오천명이나, 나눠준 제자들도 얼마나 신명났을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상상해 본다면, 이와 같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깨어나는 체험도 그렇고, 배가 불러 몸이 느끼는 풍족함은 더 말해 무엇하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퍼지는 평화 아우라는 신비로움을 더 했을 것이다.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오병이어의 현장에 있던 사람들처럼,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사는 삶의 현실에서 체험하고 싶다. ‘죽을 맛’인 세상에서 ‘살 맛’을 맛보고 싶다. 그래야 잘 사는 거 아닌가? 예수님을 교회 예배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저 갈릴리 언덕 바람부는 그 배고픈 자리처럼,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배고 고프다.